제국주의 시대의 민족주의 역사학지금까지 배운 역사가들은 모두 독립적인 사회의 지식인이었다. 그들은 지식 계급의 상위 일원이었고 당대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거나 지적으로 뛰어났고 높은 수준의 문명사회에 살았다. 그들이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 한반도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당연히 전혀 다른 시각으로 다른 역사를 적었을 것 이다. 1905년의 을사늑약부터 일본의 태평양 전쟁과 패전과 민족의 광복까지, 우리 민족은 40년 동안 수탈과 억압을 겪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거나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어떤 감정을 품고 어떤 생각을 하면서 역사를 마주했을까?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역사가들은 크게 세 갈래로 열정을 표현했다. 첫째, 민족해방 투쟁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일제의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강점과정과 조선 사람들이 벌인 해방 투쟁을 세세히 기록했다. 두번째는 조선 사람들이 민족적 자부심과 자주성을 북돋우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과거 역사를 재구성하고 재해석 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에 비해 어딘가 못난 점이 있거나 우리 사회와 역사가 스스로 발전 할 수 없는 결함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식민지 조선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러한 작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 세 갈래의 서술 방식에 대표적인 사람 3명을 뽑을수 있다.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이다. 박은식은 [한국통사] 를 출간했으며, [이순신전] 과 [안중근전] 등의 책을 썻다. [한국통사]는 제목 그대로 우리 민족이 당한 아픈 역사를 재현한 책이다. 그가 역사서술 스타일을 볼수 있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대한 서술인데 그는 본문에는 경과만 간단히 썻다. “일본인은 왕후를 칼질하여 죽였다. 그들은 평복차림으로 환도를 소지하고 호신용 총을 휴대한 일본인이 약 60여 명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장명은 매우 상세하세 서술한 법무협판 권재형의 4월 보고서를 길게 실어두었다. 그가 명성황후에 대한 자신의 문장을 간단하게 쓴 이유는 무엇일까? 명성황후 시해 장면을 쓰기 가슴이 아파서 자신의 문장으로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박은식은 민자영의 정치행위를 매우 나쁘게 평가했다. 명성황후의 비참한 최후를 자신의 문장으로 기록하다가 자칫 인간적 연민의 감정을 내비치게 될까 두려워 그랬던 게 아닌가 추측할수 있다. 박은식은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데 초점을 두고 [한국통사] 를 썼으며 그는 우리나라를 가르켜 ‘조선' 이라고 했던 다른 민족주의 역사가들과 달리 일관되게 ‘한국’ 이라는 국호를 썻다. 박은식은 조선 사람의 민족정신을 복돋우는 데, 긴요적 사실을 기록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한일 병합 조약 체결 과정을 특별히 상세하게 적었다. 당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박은식고가 달리, 신채호는 집요하게 고대사를 파고들었다. 같은 시대에 같은 문제의식을 품고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웠던 신채호는 박은식이 금태조의 입을 빌려 말했던 바를 행동으로 옮겼다. 망한지 오래인 조선의 정신을 살려 내기 위해 조선의 고대사를 쓰기로 한 것이다. 그는 조선의 정신을 자기 손으로 지워버렸던 조선 역사가들의 행위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신채호는 처음에는 개명 유학자였으나 사상적으로 박은식보다 멀리 나아가 공산주의와 아나키즘까지 일부를 받아들였다. 신채호에게 역가 서술 작업은 그 자체가 민족해방 투쟁이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 투쟁만한 것이 아니라 무장 투쟁에도 참여했다. 1910년 나라 밖으로 가서 중국과 러시아에서 무장 투쟁을 할 독립군 기지를 세우는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독립운동 단체 광복회를 결성한 업적이 있다.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 을 집필했다.

I BUILT MY SITE FOR FREE US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