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도토스와 투기디데스는 하나의 전쟁을 다루었다. 그에 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쟁, 크고 작은 국가의 흥망, 다양한 사회 제도의 특성과 변화, 자기만의 색깔로 살다 죽은 개인들의 생애, 전설과 신화의 시대에서 한 왕조에 이르는 수천년 중국 사회의 역사 전체를 입체로 재구성했다. 사기는 인간과 권력의 관계를 밑그림 삼아 시대와 문명을 그려 낸 거대한 풍경화라고 불린다. 사기의 집필 시점은 [역사 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보다 300년 정도 늦게 집필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 세계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 당하고 로마의 속주로 전락한 시기에, 중국 대륙에는 500년에 걸친 춘추전국 시대의 대혼란을 통과하고 진시황의 짧은 통치 기간을 거쳐 두번째 통일 왕조 한나라가 들어섰다. 그 때 쓰여진 책이 [사기] 이다. 교류가 전혀 없었던 두 문명에서 비슷한때 본격적인 역사서가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려는 욕망이 우리 인류의 본성이라는것으로 받아드릴수도 있을것 이다. [사기]가 [역사] 나 [펠로폰네소스] 보다 더 훌륭한 역사서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를 ‘사실로 엮은' 이야기라고 볼 경우에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사기] 는 엄청나게 많은 역사의 사실을 매우 정확하게 기록했다. 사마천이 적은 글을 보면 짧은 글이지만 정보는 풍성하다. 진시황의 가족사와 출생 시기, 태어난곳, 왕위에 오른 시기, 중국 대륙을 평정한 시점 등 사실의 수집과 기록에 관한것은 이전 역사서들과는 비교할수 없을만큼 정확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 중국 문명이 그토록 우수했다거나 사마천이 그만큼 탁월한 역사가였다고 주장할수도 있겠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작업 환경의 차이였다. 헤로도토스와 투기디데스는 민간인으로서 혼자 듣고 쓰고 역사를 썻다. 반면 사마천은 국가의 역사 기록을 관리하는 ‘공무원' 이었기 때문에 더 없이 좋은 환경에서 역사를 쓰며 일할수 있었다.중국은 역사 기록이 풍부한 나라였고 역사의 중요성을 인지한 권력자들이 기록을 세심하게 관리했었다. 점토, 동물의 뼈, 비석에 새기거나 가죽, 비단, 죽간에 쓴 기록이 많았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옛 사관들이 남긴 기록과 황실 도서관 석실에 들어 있던 책을 103종이나 참고 했다. 사마천은 천문을 관측하고 조정의 기록과 의전을 담당하는 태사령으로 일하면서 명을 받아 달력을 개편하는 사업을 수행한후 15년이 넘는 세월을 [사기] 집필에 쏟았다. 그가 [사기]를 쓴 첫번째 목적은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쓰게된 사유로는 한나라가 대륙을 통일했을때 이를 논하고 기록하지 못하고 천하의 역사 문헌을 폐기했음을 원통히 여긴 아버지 사마담의 탄식을 듣고 사마천은 “순서대로 정리해 두신 옛 문헌을 모두 논술해 감히 빠뜨리는 것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약속했기 때문에 사기를 처음 쓰기 시작했다.사기는 체계와 서술 방법이 독특한것이 특징이다. [사기] 의 몸통인 본기를 적을때에는 황제 또는 황제에 준하는 권력을 행사한 인물의 행적과 업적을 서술 했는데, 전설 시대 황제부터 한무제까지 최고 권력자와 관련이 있는 사실과 사건의 경위를 기록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에 반면[사기] 속의 [열전] 은 행운과 불운의 간섭을 받으면서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다간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인간의 삶을 조명하는 글을 보여준다. 사마천은 천하의 역사를 그리려면, 사건과 인물과 제도와 문화를 모두 살펴야 한다고 믿었고 그에 적합한 서술 체계를 창조했다. 그렇지만 사마천이 중국 최초의 역사가는 아니었다. 중국에는 [사기] 보다 먼저 나온 역사책이 많았다. 공자가 춘추시대 노나라의 역사 242년을 정리한 책 [춘추] 는 오랫동안 역사 서술의 교과서로 통했지만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 한 것은 아니었다. 공자는 권선징악 이라는 도덕규범에 따라 ‘깎을 것을 깍고 보탤 것을 보탠' 역사를 썼기 때문에 [춘추]의 내용에 대한 진위와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춘추필법' 그자체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사마천은 ‘춘추필법'을 배격하는데 그치지 않고 역사 서술의 내용과 형식을 혁신하여 더 나은 대안을 제시 했으며, 역사 서술은 무엇보다도 사실을 정확하게 더 나은 대안을 제시 했으며, 역사 서술은 무엇보다도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작업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사마천은 이렇게 사실을 기록하는 일에 엄청난 열정을 쏟았지만 그것을 역사 서술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으며 인간 본성의 빛과 그늘, 삶의 의미, 군주의 덕성, 권력의 광휘와 비루함, 반복되는 사건의 패턴을 포착하고 드러내려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와 인간을 연구하는 인문학자들, 지나간 역사를 보면서 삶의 보편적 의미를 사유하는 평범한 역사 애호가들,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에 관심을 가진 기업인과 정치인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사기]를 읽는다고 한다. 사마천은 국가와 사회는 정치권력과 경제 제도, 사회 제도, 법률, 예술과 문화 양식의 복합체이며 그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 구조와 양상을 분석했다. 권세와 지위는 없었으나 독특하고 자주적인 인생을 살아 나감으로써 인간의 본성과 삶의 의미를 사유할 실마리를 던진 이들을 망각의 어둠에서 건져냈다. [사기]는 또한 개인사의 치욕을 견뎌 낸 사마천이 역사의 수많은 사실을 마주하면서 느꼈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과 감정도 전해준다. 제 3장 이븐 할둔 - 최초의 인류사를 쓰다.
20세기가 저물어 가던 무렵 ‘빅 히스토리' 또는 ‘인류사' 라는 역사 서술의 새로운 흐름이 태동했다. 이 조류를 선도한 역사가들을 물질세계와 자연, 생명과 인간에 대해 과학자들이 밝혀낸 최신 정보와 지식을 역사 서술에 끌어들였다. 그들이 쓴 역사는 빅뱅과 우주 탄생에서 출발해 지구의 형성과 생명의 태동, 인류의 등장 문명의 출현, 과학 기술의 발전과 인류 문명의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나아간다. 인류사 저자들은 천체물리학과 지질학, 기후학, 진화 생물학, 뇌과학 등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를 활용해 문명의 발생 원인과 발전 향상을 해명했다. 최초의 인류사는 600년전 북 아프리카에 살았던 이븐 할둔(1332~1406) 에 의해 적혀졌다. 할둔은 문명을 환경의 산물로 간주하고 세게를 일곱 기후대로 나누어 환경과 문명의 관계를 살피면서 인류사를 썻다. 그가 적은 [역사서설] 은 인류사의 원형으로 역사의 역사에서 합당한 지위를 가져야한다. 다음은 [역사서설 ]의 처음 문단이다. 지구의 형태는 공모양이고 물에 둘러싸여있다. 육지는 지구 전체의 반에 약간 못미치며, 공 모양의 표면 위에서 북쪽에 더 많이 분포되어있다. 육지의 거주 가능 지역은 전체의 4분의 1에 달하며 이는 다시 일곱개의 기후대로 나뉜다. 문명은 태양의 열기가 온화한 제3, 제4기후대에서 가장 발달하며, 더 춥고 건조한 제5, 제6, 제7기후대로 연결된다. 현대 과학의 수준과 비교하면 활둔이 활용한 지리 정보와 기후학 지식은 매우 빈약하고 부정확하다. 그러나 환경과 문명의 관계를 고찰하는 관점과 방법은 나무랄데 없이 과학적이다. 그는 인간의 삶이 자연에 발을 딛고 있으며 문명도 자연환경의 강력한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분투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역사를 문학이나 철학과는 다른 학문으로 정립하려는 열망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할둔은 인류문명의 탄생과 소멸을 지배하는 보편적 역사법을 찾았다고 확신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이 확신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비난받아야 하는것은 아니다. 그가 개인의 힘으로는 극복 할수 없는 시대의 제약을 받으면서 역사를 서술 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14세기 아랍 사람들은 과학 지식이 부족해서 자연과 인간과 사회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종교와 세속의 권력이 한몸으로 결합한 교정일치 사회의 억압 때문에 할둔은 이성적, 논리적 추론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 힘들었다. [역사서설]에는 역사서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책 전체에 걸쳐 길고 지루한 종교적 찬사를 끝도 없이 늘어 놓았다는 점이다.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 라는 제목을 붙인 [역사서설] 서문의 첫 대목에 내용은 이와 같다. 알라의 연민을 구하고 알라의 자비를 찬양하는 종 압둘 라흐만 븐 무함마드 칼둔 알하드라미는 말한다. 힘이 있고 강하신 알라께 감사합니다. 그분은 전지 하신분이니 대화나 침묵으로 그분을 속일 수 없다. 그 어떤것도 그분을 약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분은 흙으로 숨을 빚어 우리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아까 본 7개의 기후에 대한 각각의 설명뒤에도 뜬금없이 알라 예찬을 끼워 넣었다. “ 알라께서 전 세계의 사람들을 위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밤과 낮을 부별하셨다!”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발적이고 진지한 신앙고백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종교와 세속권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택한 신변 보호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당시 종교와 국가 권력이 한몸이 되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신성모독’ 이라는 비난과 공격을 받을 위험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의 문제점이 있음에도 그는 최소의 역사서를 적은 위대한 인물로 지금까지 사랑받는다.